top of page
검색

연설

작성자 사진: DA LEEDA LEE

최종 수정일: 2020년 9월 17일

지금부터 드릴 얘기는 뻔합니다. 매년 이 곳에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다녀갑니다. 인생을 완성한 자들이죠. 첫 마디를 뗄 때 그들은 업적을 자랑하는 적이 없습니다. '나 또한 낙제생이었다.', '비좁은 방에는 우리 가족과 또다른 가족, 쥐들이 함께 살았다.' 위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도 한때는 평범했고, 오히려 여러분의 발이 미처 닿지도 않는 음지에서 왔다는 겁니다. 그 첫 마디는 여러분을 어떤 흐름으로 안내했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내려오려 합니다. 잘나지 않은 대다수의 우리들이 뉘인 척박한 땅에 발을 들입니다. 같아지고 싶은 겁니다. 사회적 지위, 재력, 인맥, 심지어는 매일 먹는 음식부터 안식에 드는 침대의 냄새까지 모두 다른데도 그들은 과감히 설파합니다. 우리와 그들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이 성대한 졸업식뿐만 아니라 유튜브에서 동기 부여에 관한 영상에서도 방황하는 어린 양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주는 연사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해보세요. 그들은 당신과 같습니까?


체면을 생각한다고 해서 입바른 소리만 할 심산이었다면 애초에 저는 이 자리에 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예고를 했으니 이제 발포할 차례군요. 우리는 그들의 아래에 있습니다. 이룰 법한 목표를 잡고, 적절한 습관을 들이고, 구글에 동기 부여를 검색하고, 마침내 답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이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떠드는 건 입이 아플 정도입니다. 매 졸업식마다 초청된 연사들은 답습된 직관으로 성공이 아닌 실패를 논했습니다. 그리고 매 졸업식마다 참여한 학생들은 그 달콤한 천사의 찬가와도 같은 말솜씨에 흠뻑 감복했습니다. 작정하고 의도한 이는 없겠지만, 21세기의 연사라는 건 맹목적으로 공감에 집착합니다. 어쨌든 기분은 좋으니까요.


당장 가족이나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나면 여러분은 난생 처음 써본 그 학사모는 까맣게 잊고 현실로 돌아갑니다. 눈 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는데 온 신경을 쓰고 집에 돌아오면 수면 ASMR을 들으며 숙면을 위해 갖은 노력을 들입니다. 못다한 잔일을 더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 말이죠. 장담하건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회전목마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 대목을 뺀 모든 점에서 우린 너무나도 다릅니다. 냉철한 철학자나 신실한 종교인과 맥락을 같이 여러분의 자아를 보듬을 생각은 없습니다. 많은 관점에서 위에 사는 사람과 아래에 사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중 반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고 나머지 반은 젖먹던 힘까지 쥐어짰을 때 메울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셀 수 없는 변화 중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모습에의 변화가 적을거라는 건 반박할 수 없죠. 그렇기에 성공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각자 다르기에 인류에 몇 없을 알파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는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 자신만이 스스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저 또한 낙제생이었습니다. 퀘퀘한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잠에 들었었고 이외에도 여러분에게 팔 제가 겪은 실패는 한참 남아있습니다. 만약 오늘 제가 그렇게 운을 뗐다면 여러분 중 훗날 이 연설을 기억할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생에 한번뿐인 여러분의 졸업식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오늘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여러분의 눈총을 받으면서요. 그럼에도 저는 알려야 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그 밀도만큼 무겁게 주인을 찍어누를 겁니다. 당부드리건대, 눈 감는 그 날까지 절대 누군가 손길을 뻗어줄 거라고 상상하지 않길 바랍니다. 가족도, 친구도, 은사도, 그리고 여러분 눈 앞의 저도 어깨 위에 놓인 거대한 시간을 피 흘리며 맨손으로 받치고 있으니까요.


기꺼이 들어올리세요. 그리고 이 자리에 와 똑같이 말해주세요. 양보할 것 없이 그건 모두 네 몫이라고.

조회수 9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230528

아직도 로실링에서 우현이 형이 날 소개할 멘트를 잠깐 고민하고 "얘는 음악하는 애야."라고 말문을 마치던 장면을 되짚는다. 난 기분이 나빴지만 그게 그 형의 적막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대로, "얘는 뭐 어중이 떠중이야."라고 말했어도 같은...

221227 2

겨울에 책상 앞에 앉아서 패딩 입고 가만히 앉아있다보면 이 노래가 그리워진다. 언제 이 노래를 처음 들었는진 기억이 안나는데 확실한 건 고2 때 야간 자습 중에 전자 사전으로 이 노래를 반복 재생하면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근데 가만히...

221227

허드렛일에 꾸준히 시간을 들이는 걸 싫어했던 때가 있었다. 그 중 단연 손에 꼽을 정도로 싫어했던 루틴은 바로 일기 쓰기였다. 정확히는 신세 한탄이 취미인 자들의 보이기 위한 일기, 더 정확히는 그걸 쓰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하...씨발 또...

Comentario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