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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개.

작성자 사진: DA LEEDA LEE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문학 동아리를 지원했었다. 결과는 참패. 아는 것도 없었고 당연히 열정도 없었으니 이치에 맞는 결과였다. 나중엔 고작 내 손바닥만 한 베이지색 문집이 나왔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아마 그 자그마한 책이 문집이라는 건 몰랐을 것이다.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도무지 잠은 안 오고 교실 뒤편의 칠이 벗겨진 주황색 사물함에 기대고 있는 와중에 마침 그 위에 던져진 듯 놓인 책이 있지 않았을까. 이래저래 별 대단한 열정 없던 나는 페이지 모서리를 엄지로 쓱 훑기 시작했다. 그 손을 뗀 페이지엔 친구 K의 시가 있었다. 북새통 같던 교실의 소음이 잦아드는 것만 같은 고요가 스며드는, 그런 시였다. ‘안녕, 개’라는 이름이었다.

K는 적어도 개를 키운다는 얘기를 나에게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라는 동물과는 좀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 시는 여전히 문학엔 문외한인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시다. 문장이 수려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다름 아니라 우리 집에 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와의 첫 만남은 혼란했다. 어디 얹혀살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해의 어느 날, 큰이모네 집에 외가 친척이 한데 모인 적이 있다. 처음 만난 사촌 동생의 팔은 미슐랭 타이어 같았다. 귀엽다는 감상보단 더는 내가 이 일가에서 가장 어리지 않다는 사실이 더 와닿았다. 벌컥 들이켠 물 잔에 담긴 소주는 아무리 입을 헹궈도 가시지 않았다. 그립지도 않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지루하기만 한 가족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속 도로 위에서 엄마와 어떤 아저씨는 새까만 개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제 엄마의 이름과 비슷하게 단비라고 지었다.

엄마와 같이 살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모르는 사람 집에 얹혀사는 일도 이제 끝이라고 믿었다. 그것도 잠시, 엄마는 저번에 봤던 아저씨를 이제부터 삼촌이라 부르라고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에 관해서는 이미 웬만한 어른보다도 빠삭했다. 말썽 일으키지 않고, 묻는 것에 대답하고, 하라는 대로 하면 적어도 미움은 사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집에는 강아지가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강아지와 10세 인간인 나 사이에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쪽은 뻔할 뻔 자였다. 전학 온 이 동네에 친구가 있을 리 만무한 나는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그 강아지와 투니버스를 즐겨봤다. 두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강아지가 미웠지만, 강아지를 멀리하기엔 너무 심심했다. 엄마와 삼촌은 빨라도 열 시나 돼서야 들어오니까. 채우기 버거웠던 일기 스무 줄은 강아지 얘기면 금방이었다.

친구가 생겼다. 동화책이나 노래 따위를 부르던 조촐한 영어학원을 그만두고 왠지 찬 공기가 감도는 종합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엄마가 좋아했다. 조그맣고 새까맣던 강아지는 점점 크면서 회 검정 색깔의 늠름한 개가 되었다. 학원을 또 옮기고, 외고 입시 반에 들어갔다. 공부를 잘하면 외고에 갈 수 있고, 외고에 가면 공부를 잘 하게 돼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려니 하고 열심히 했다. 공부는 생각보다 피곤했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가기 전 집에 들르면 단비는 짖으며 나를 반겼지만 나는 곧장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알람이 울리면 학원에 갈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문지방을 밟는 순간 단비는 달려와 나를 졸졸 쫓아왔다. 그런 단비를 두고 나는 학원으로 가 다시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수업을 들었다. 나는 친구가 많아졌지만, 단비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외고 입시는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등학교는 전원 기숙사 제도여서, 매 주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될 수 있으면 엄마와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좋지 않은 외고에 갔다. 그것도 엄마의 생각이었다. 트집거리가 생기면 대화의 끝 무렵엔 이미 끝난 입시에 대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하게 됐다. 더는 엄마와 함께 사는 게 즐겁지 않았다. 학교는 무척 즐거웠지만, 주말이 다가오면 그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질 정도로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아빠와 살고 싶어졌다. 제대로 씻고 다니지도 않고, 편의점도 없는 동네라 대학은 못 가겠지만 아빠를 따라 기술을 배우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학교엔 조기 졸업 제도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아예 없는 것보단 낫겠다 싶었다. 초반의 결심과 달리 어영부영 공부해서 결국엔 수능을 망쳤다. 조기 졸업 때문인지, 시간이 지난 탓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는 예전처럼 그다지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아빠에게 돌아가야겠단 계획은 새하얗게 까먹고, 재수에 실패하고, 세 번째 수능을 치르고 나서야 대학에 붙었다. 분노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3년이 지나가는 동안 단비를 떠올리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우리 엄마는 그런 말 한 적 없지만, 대학에 오니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다. 그 하고 싶은 거라는 것들은 대체로 서울에서 가능했다. 미래를 생각하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재밌기만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3학년, 학과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다시 수능을 준비하겠단 명목으로 휴학을 했다. 본가로 돌아오니 이젠 어엿한 중년이 된 단비가 있었다. 여전히 잘 짖고, 엄마와 삼촌이 있으면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에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 감상도 잠시, 달갑지 않게 수능을 준비한다고 하니 엄마는 다시금 나를 비난했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혼자 집을 구하고,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남의 돈을 버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일은 보람찼지만, 생활이 하루하루 망가져 갔다. 보강이 없는 주말, 오랜만에 만난 T는 내 허리가 이상하다며 쭉 펴볼 수는 없겠냐 물었다. 어물쩍 답변하고 넘어간 후, 집에 돌아오니 그 말이 생각이 나서 거울 속 내 모습을 봤다. 허리는 숙인 듯 굽어 있었고 펴지지 않았다.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잔고에 그럴 법한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1년 만에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술해야 한다는 소식과 동시에 돈 얘기를 하는 내 한심함에 치가 떨렸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부모님과 나. 정확히 따지자면 엄마와 나는 지난 일을 짚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건 나와 부모님에겐 서로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괴롭혔던 이 사건은 그럭저럭 무마됐지만, 시간은 무언가를 해결해주기만은 않았다. 부모님의 차에서 오랜만에 만난 단비는 못 알아볼 만큼 늙고 야윈 모습이었다. 내 생활에만 혈안이었던 몇 년 새 단비는 나보다 몇 배로 시간을 들이키고 있었다. “단비야. 형아 왔어 형아.” 탁한 눈동자에 앙상한 몸으로 고개를 떨군 단비에게 엄마는 큰 소리로 말했다. 묵묵부답인 단비에게 손을 내밀자 단비는 천 근 같은 고개를 돌려 내 냄새를 맡고 나를 잠깐 바라볼 뿐, 세차게 꼬리를 흔들지도, 짖지도 않았다. 차에서도, 길에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만 할 뿐이었다.

부모님과는 사이가 점차 좋아졌다. 내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복용하던 약을 점차 줄여서 끝내는 병원에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늦게나마 학업에 충실해지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볼품없었지만, 엄마는 ‘더 열심히 하면 되지.’라며 서툰 격려를 해주었다. 새로 이사한 본가의 바닥에는 온통 발수건 따위가 깔려 있었다. 단비가 제 몸을 가누지 못해서 미끄러질 것을 염려하여 깔아두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단비는 좀체 방을 돌아다니지 않고 그저 누워있기만 했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바둥거리며 일어나곤 했다. 그마저도 누군가가 손으로 몸을 잡아줘야 가능한 얘기였다. 몇 시간을 간격으로 엄마는 단비의 눈에 안약을 넣었다. 모두 잠든 새벽에 혹여나 단비가 돌아다니다가 다칠까 걱정이 된 나머지 엄마가 두, 세 시간을 쪼개 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적어도 1년은 족히 넘었을 시간을, 엄마는 그렇게 살았다. 시간이 나면 파주에 들렀다. 엄마와 삼촌, 물론 단비도 함께 근교를 돌아다녔다. 비로소 가족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뒤늦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떨어져 살고 노년이 된 단비를 잘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사진과 영상으로 그 날을 남기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을 담을 때마다 매번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되뇌었다. 떠나보내야 할 때가 머지않았음을 알기에 비록 괴롭더라도 나를 지키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2020년 8월 1일 새벽, 단비는 끝내 우리를 떠났다. 단비가 스무 살이 되면, 집에 대학생 아들이 둘이라던 엄마의 농담은 그저 농담으로 남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달라진 건 딱히 없다. 그래도 몇 개 꼽자면 과음하지 않는 것, 부모님이 주에 두 번꼴로 나를 찾아오는 것, 그리고 내가 파주에 가지 않는 것 정도가 있다. 농담이지만 엄마가 예전보다 거북이를 갖다 버리란 말을 더 자주 하기도 한다. 부모님이 나를 자주 찾아오는 이유도, 엄마가 하루가 멀다고 내게 연락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물론, 내가 파주에 가지 않는 이유 또한 부모님은 알고 있다. 시답잖은 발라드 노래 가사 같지만, 없던 주사도 생겼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친구들에게 술 먹고 민폐 끼치는 역사는 스물넷 이래로 종결되었다 믿었는데, 더 독한 게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늘은 운 없게 밤낮이 뒤바뀌어서 애꿎은 시간만 축내는 참이었다. 유튜브에서 반려동물 영상을 보다 보니 괜히 단비가 생각이 났다. 펫로스 증후군, 강형욱은 같은 처지인 사람들과 감정을 솔직히 나누며 이겨내라며 조언한다. 헛소리라며 중얼거리다가 단비 영상이 있는 갤러리에 들어갔다. 비록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대다수지만, 찍어놓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에 열중하는 게 필요하다. 열중해서 목표를 손에 넣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자신을 속여야 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얼추 맞는 얘기다. 오늘 새벽의 감정을 속이려 나는 단비와의 시간을 되짚는 중이다.

K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건 일 년 전이다. 살면서 두 번 없을 친구, 미숙한 내가 일도 아닌 일로 힘들어할 때면 위로 같은 걸 해줬다. 위로인지 뭔지 아주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괜스레 마음이 풀리는 그런 말이었다. 그런데 K와의 시간은 잠정적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 사이엔 공유할만한 거라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만 남게 됐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 친구가 내게 건넸던 위로 같은 말들을 쥐어 짜내서 보려고 하면 이내 머리에서 흩어진다. 좋은 의미로 걔는 그런 애였다. 이제는 그 습작의 제목만이 내게 남은 K의 문장이라는 게 묘하다. 그 시는 참 덤덤했다. 슬픔 따위를 꾹꾹 눌러 담는 그런 글씨들이었다. 만약 K가 개를 키웠다면 그렇게 이겨냈을는지, 어쨌거나.

안녕,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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