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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D+20

작성자 사진: DA LEEDA LEE

최종 수정일: 2020년 9월 17일

이틀에 걸친 나름의 계획 끝에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다. 별다른 의지는 없지만 뭔가 오늘부터 잘될 것만 같다. 고풍스러운 레코드 판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에, 팍팍한 눈을 비비고 고깔 같은 모자가 포함된 귀여운 파자마를 입은 채 커피포트에서 어제 산 원두를 내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좋은 아침의 클리셰. 그런 장면의 피사체가 되고 싶단 마음은 거의 없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꿈의 능선을 다시 넘어온 2020년 오늘의 내 모습과는 상관 없는 묘사다.


어김없이 오늘도 별일 없다. 별일이라면 하고 싶으면서도 해야만 하는, 더할나위 없이 보탬이 되는 일이다. 고생 끝에 자리를 잡았거나, 부모님의 등살에 밀렸거나, 아니면 순전히 어딘지 모를 앞으로 나아가려는 생동감을 가진 사람들. 잘 살고 있을 어디꼐의 그들은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 하고 싶지만 할 필요는 없는 일. 삼대가 먹고 살도록 돈이 차고 넘쳐난다더라도 기묘하게 삶은 그 양자택일의 협곡에서 그 누구라도 꺼내주지 않는다. 그럼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어쩐 일인지 나의 달력에는 해야할 이유도, 하고픈 열망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아있다. 가엾게도 하필이면 이 낙제점을 아침에 선고받은 탓에 좋은 아침이란 건 오늘도 생략되었다.


재밌지도 않은 게임을 한다. 재밌지도 않은 영상을 보고, 재밌지도 않은 생각을 한다. 마치 재밌지도 않은 일에 목매는 별종처럼. 웃긴 건 재밌지도 않은데 시간은 잘 간다는 점이다. 자로 재보고 선을 그을 필요도 없이 시간이란 건 언제나 똑같이 쏟아지지만, '즐거운 일은 시간이 잘 간다.'는 격언의 역은 적어도 성립되지 않는 셈이다. 고쳐보자면 '기왕 시간 가는 거, 조금이라도 재밌게 보내라.' 정도가 되겠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더 침대에 늘러붙어 있다간 일말의 의미도 없는 여생을 보내는 데에 관성이 붙을 게 빤히 보였다. 훗날 빈손으로 눈 감는다 하더라도 핏기 없는 가죽을 남길 수는 없으니까.


"요샌 재밌는 게 없어. 코로나 때문에 가게도 다 닫고 확진자는 늘어나니까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다니까?" 가릴 것 없이 누구라도 요새는 이런 뉘앙스다. 나 또한 지루했지만 왠지 갇혀있다는 생각이 좀체 들지 않았다. 난 늘상 해오던 걸 이미 하고 있지만 언제나 심심했다. 역병이 퍼지고 왠지 무언가를 뺏긴 기분이 들고나니 그제서야 관찰할 수 있었다. 내겐 뺏긴 게 없었다. 되돌아볼 수 있는 언젠가의 그 날처럼,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즐겁다고 여겨온 대개의 생활은 즐겁다기보단 단지 쉬울 뿐이라는 건 금세 내 삶에 시끄러운 경종을 울렸다.


Y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6시에 저녁을 먹고나서, 그러고나서 내 하루엔 아무 것도 예정되어 있지 않다. 오랜만에 들른 독수리다방에는 책을 펼쳐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이들이 있고, 그들 사이에서 나는 다만 변해야만 했다. 이 일기를 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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